금융위기·산업변화·취업난 영향 … 기능경시풍조 점차 쇠퇴
2009-09-16 오후 12:54:12 게재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는 최근 한국산업인력공단 관계자를 만나 “훌륭한 기능인을 양성하는데 ‘올인’하겠다”며 “기업인이 문화·체육활동을 지원하는 경우는 많지만, 나는 기술부문에서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의 계획을 소개한 관계자는 “이 전무가 매우 진지했고, 기능인 육성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이 전무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장을 지난 주말 방문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비교적 빨리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산업 구석구석에 있는 우수한 기능 인력이 밑바탕이 된 것 같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기능인 보는 눈길 달라져 = 기능인을 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공돌이’, ‘기름장이’ 등이란 말로 경시하던 기능인을 요즘은 ‘산업기술인’, ‘기술자’, ‘숙련기술인’ 등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기능인의 중요성을 먼저 알아챈 곳은 대기업들이다.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 주최 전국기능경기대회 후원사는 2007년 4곳이었다가, 올해 9곳으로 늘었다.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를 후원하는 기업·단체도 2007년 6곳에서 올해 16곳으로 급증했다. 최근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삼성전자는 선수단 훈련비 지원은 물론 대회 기간 브랜드홍보관을 별도 운영했다. 이는 기업들의 기능인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삼성그룹은 2007년부터 우수기능인 확보를 위해 기능경기대회 메달리스트를 대규모 채용하고 있고, 현대중공업은 기능대회 입상자에게 특진과 호봉승급 혜택을 주고 있다.
기능인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기능 장려를 위해 정부가 매년 개최하는 기능경기대회 인기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올해 전국기능경기대회 참가자는 2097명으로 작년(1833명)에 비해 14.4% 늘었다. 지방기능경기대회도 올해 8905명이 참가해 지난해(7877명)에 비해 11.5% 증가했다.
이에 따라 민간 기능경기대회에 대한 정부지원 횟수도 2006년 32회, 2007년 38회, 2008년 44회로 꾸준히 많아지고 있다.
◆변화 원인 다양 = 기능인을 보는 사회의 시각이 바뀌는 이유는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우선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원인으로 꼽는다. 금융자본이 비대해지면서 경제체제마저 흔들자 국가적으로 제조업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내실 있는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선 기능인재가 우선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임건희 기능장려팀장은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제조업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며 “기업들도 지속적인 사업성과를 위해 기능인재를 중시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말했다.
산업 고도화도 기능인 중시풍토에 기여하고 있다. 과거엔 기능을 단순반복 업무로만 여겼으나, 최근엔 다기능훈련을 통해 맡은 업무를 창조적으로 소화하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제조업 생산시스템이 대량생산체제에서 다품종소량생산체제로 전환하면서 현장업무에 밝고 창의적인 기능인재가 필요해졌다. 노동부 박성희 직업능력정책과장은 “요즘 기업들은 복합기능인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같은 흐름은 인건비를 절감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 고도화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장기경기침체로 인한 취업난도 인식변화의 원인이다. 청년실업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실속 없는 ‘대학졸업장’ 대신 취업이 빠른 기능습득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진로직업교육과 김대관 교육연구사는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학력보다 실력을 먼저 고민하는 변화가 생기고 있다”며 “좋아하는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소개했다.
정부도 기능인재 양성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부는 기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기능장려법’ 명칭을 ‘숙련기술장려법’으로 바꾸고, 기업에서 기술분야 종사자들에게 임금과 인사상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최근 전문계 고교 평가에서 그동안 배점이 낮았던 취업실적 비중을 대폭 상향할 계획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능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넘기 힘든 벽이다.
지난해 서울지방기능경기대회 목공직종 은메달리스트인 이한나씨는 올해 서울디자인고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에 진학했다. 이씨는 메달을 목에 걸면 대학을 다니지 않고도 자신이 좋아하는 목공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선배들은 말렸다. ‘학벌 없이 기능만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씨는 “전문계 고교를 진학할 때도 부모를 설득하기 어려웠다”며 “기능보다 학력을 중시하는 사회풍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동공고 김종관 교장은 “중학생들이 전문계 고교를 선택하려해도 부모를 설득하기 쉽지 않다”며 “또 졸업을 앞둔 학생들 상당수가 높은 실력을 쌓고도 기능을 인정해주는 대기업을 선호해 대학진학을 희망한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산업현장에서 청년 기술인력 부족이 심각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국가 차원의 숙련기능인 위기가 빚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존 숙련기능인의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중인데다, 병적일 정도로 만성화된 이공계 기피현상이 너무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기업·학교 등이 함께 기능인에 대한 인식제고에 힘쓰고, 열악한 사회경제적 보상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
■ 사회변화 못따르는 기능장려정책
직업능력개발 예산중 1% 불과
정부가 추진한 기능장려 정책은 최근 사회변화를 따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위탁을 받아 지난달 제출한 ‘기능장려사업 선진화를 위한 기능장려법 개정방안 연구’에 따르면 고도경제성장기에 우수기능인 선정과 지원, 기능경기대회 등을 통해 기능인력 양성의 주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엔 급격한 산업구조와 사회 변화에 부응하지 못해 기능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해소에 미흡했고, 학교교육 단계에서부터 기능에 대한 사회인식을 바꾸려는 노력도 적었다. 특히 기능장려사업 올해 예산은 191억원으로 직업능력개발사업 예산 1조7321억원의 1.1%에 불과하다. 재원의 안정성도 크게 떨어진다. 또 ‘명장’ 등 소수 엘리트 위주의 사업에 치중, 기능인력 전체에 대한 인식제고나 지위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보고서는 “우리나라 기업의 인사관리체계는 기능인이 숙련을 향상시켜도 승진과 임금 상승 등의 보상이 적다”며 “숙련향상을 위한 법적 장치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
■ 통계조사로 본 기능인에 대한 인식
국민 10명중 9명 “기능인 대우 미흡”
기능인에 대한 우리사회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통계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지난해 12월 조사전문기관인 파워리서치에 의뢰해 일반인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능인에 대한 긍정도’에서 65.2점(100점 만점)이 나왔다. 이는 2006년 같은 내용의 설문조사에서 나온 47.1점(갤럽조사, 표본수 1000명)에 비해 18.1점이나 상승한 결과다.
기능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처럼 호전되고 있는 것은 갈수록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학력보다는 실무능력과 자격을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청년층 사이에서도 적성에 맞는 기능 연마를 강조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달리 해석하면 여전히 우리 국민의 3분의 1 이상은 ‘기능인은 3D 업종 종사자나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기능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응답자 중 절반 가량인 48.9%는 기능인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기능인에 대한 인식전환’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또 기능인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한 방안으로는 ‘우수 기능인 선정과 포상’(35.6%)을 가장 많이 꼽았다.
결국 기능인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은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 기능인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대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취업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 7~8월 수도권지역 취업자 3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능 인력이 사회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에 78.02%가 ‘매우 크다’(12.01%) 또는 ‘큰 편’(62.01%)라고 답했다.
반면 우리나라 기능 인력이 사회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만큼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80.52%가 ‘대체로 미흡’, 10.06%는 ‘매우 미흡’하다고 답해 절대 다수가 기능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 가 낮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능인 대우에서 미흡한 부분으로는 ‘경제적 보상’(50.9%)을 가장 많이 꼽았고, ‘근무환경(30.82%), ‘사회적 인식’(29.75%), ‘기업내 인사관리’(20.79%), ‘사회보장’(5.02%) 등이 뒤를 이었다. 열거된 모든 항목이 미흡하다고 응답한 비율도 30.47%에 달했다.
구본홍 기자
■ 기능인 중요성에 눈뜬 대기업들
삼성, 메달리스트 우선 특채
현대차 올림픽 입상자 2천만원 포상
국내 대기업들 사이에서도 기능인 양성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능인 육성 프로그램과 우대책을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다.
삼성은 대표적인 예다. 삼성은 지난해부터 사내 기능올림픽을 개최하고 있다. 그룹내 기능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기능수준을 높이자는 취지에서다. 이 대회에서 거둔 입상 성적은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삼성은 사내 뿐 아니라 국내 산업발전을 위한 기능인 양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우리나라가 ‘제조 강국’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기능인력 양성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지난 2006년 노동부와 ‘국내기능올림픽’ 지원협약을 체결했고, 2007년에는 국제기능대회와 시즈오카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등을 후원하기도 했다. 또 얼마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도 후원사로 참여했다.
삼성은 각종 기능대회를 후원하는데 머물지 않고 지난 2007년부터는 우수 입상자를 적극 채용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전국기능경기대회 입상자와 참가자들에게 입사의향을 물어 지원자 119명중 66명을 채용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도 다양한 기능인 우대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전국기능경기대회 입상자가 입사할 때 우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명장을 취득한 사원에게는 대표이사 표창과 200만원의 상금, 호봉승급의 특전을 주고 있다. 또 기능장 취득자에게는 매월 3만원의 자격수당과 승진시 가점을 주고 사내검정 명인 등급자에게도 자격수당으로 매월 3만원씩 지급하고 있다.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자에게는 특진 및 호봉승급과 함께 200만~1000만원의 포상금도 주어진다.
현대자동차는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자에게 회장 표창과 함께 최대 2000만원의 포상금과 2년의 경력 가산 혜택을 부여한다. 이밖에 포스코도 기능장 자격 취득자에게 100만원, 기사 자격 취득자에게 50만원씩 격려금을 지급하는 등 우수기능인 장려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 선진국들 기능장려 어떻게
독일 기능 중시 100년 전통
일본 60년대부터 집중육성
독일, 일본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능인 육성을 위해 국가가 나서 힘을 쏟아왔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기능을 중시하는 풍토가 마련됐다.
세계 최고 제조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독일은 100년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기능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왔다. ‘공장법’을 개정, ‘수공업법’을 시행한 것이 빌헬름 2 세때인 1897년이다.
‘마이스터’ 제도는 독일이 기술인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마이스터란 원래 주인, 스승, 명인, 대가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한마디로 이론보다는 현장 경험과 손기술로 최고 실력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뜻한다.
마이스터가 되려면 보통 3년제인 직업훈련원을 나와서 일정 기간 경력을 쌓은 뒤 마이스터 과정 교육을 받고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분야는 소시지제조, 맥주제조, 자동차 수리, 기계, 배관, 유리초자 가공, 금속 제련 등 다양하다.
일단 마이스터 자격을 획득하면 그 분야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정규 공과대학을 나오고 공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다.
마이스터는 수공업 분야의 자영업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견습공을 훈련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독일에서 마이스터가 운영하고 있는 수공업 기업 수는 지난해말 기준으로 총 96만7000여개, 이곳에서 일하는 취업자 수는 483만명에 이른다.
독일에서는 청소년들이 진로를 결정할 때부터 기능인의 삶을 선택하더라도 기술력을 발휘하면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가르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수공업협회와 직업협회, 직업훈련기관, 인문교육기관이 협력해 인문계열 학생들이 수공업 기능인으로 진로를 변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일본도 1960년대부터 ‘직업능력개발촉진법’을 제정하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기능인력육성 정책을 실시해왔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취업구조의 변화,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등으로 제조업 비중이 줄고 기술력 쇠퇴 조짐이 보이자 일본은 ‘모노쯔꾸리(제조) 기반기술 진흥기본법’을 만들고 기술진흥정책을 강화했다.
일반적인 직업 및 기능 훈련 외에 특별한 숙련 기능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도 시행되고 있다. ‘현대의 명공’은 대표적인 예다. 이 제도는 탁월한 기능자에 대한 표창을 통해 기능을 존중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기능자의 지위와 기능수준을 향상시키자는 취지에서 1967년부터 시작됐다. 1986년에 시작한 우리나라의 ‘명장’제도에 비해 20여년이나 앞선 셈이다.
명공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능의 정도가 탁월해 ‘제1인자’라 할 수 있어야 하고, 관련 기능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서 15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한다. 나이도 35세 이상으로 제한돼 있다.
이 제도에 따라 매년 ‘명공’으로 선발된 숙련기능인에 대해서는 표창장과 함께 10만엔의 상금이 주어진다. 1회 표창 이후 현재까지 표창 받은 ‘명공’은 5000명에 달한다.
일본은 이밖에도 기계로는 대처할 수 없는 고도의 기능을 구사하며 고정밀도, 고품질 제품이나 시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인들을 대상으로 ‘고도숙련 기능자 인정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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